한 걸음 가까이

스낵걸즈 외전 · 네아의 입부 이야기

네아 단독 흑백 표지 · 제목 부분에만 원고지 한 줄

1

자기소개 카드의 취미 칸에는 책 읽기라고 썼다.

새 교과서를 펼칠 때마다 책등에서 풀이 덜 마른 듯한 냄새가 났다. 책상 오른쪽에는 아직 비닐을 벗기지 않은 시간표가 놓여 있었고, 앞자리 학생은 뒤를 돌아보려다가 의자 다리에 걸린 가방을 두 번이나 밀어냈다. 서온여고에 입학한 지 사흘째. 아침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자리 배치 속에서, 내 책상 위의 물건들만 어제와 같은 순서로 놓여 있었다.

“무슨 책 좋아해?”

앞자리 학생이 내 종이를 보고 물었다. 나는 마지막 글자의 삐침을 괜히 한 번 더 그었다. 무슨 책이냐고. 대답할 제목은 있었다. 여러 권을 말할 수도 있었다. 다만 어젯밤 내가 가장 오래 읽은 것은 책이라기보다 게임에서 주운 쇠추의 설명이었다. 종 안쪽을 쳐서 소리를 내는 쇳덩이였다. 닳아서 읽히지 않는 문장 끝 때문에 같은 성벽을 네 번 돌아다녔다는 이야기까지 하려면, 우선 왜 주인공이 무너진 성에 들어가야 하는지부터 설명해야 했다.

“이것저것요.”

“나도. 소설?”

고개를 끄덕이자 상대는 가방에서 추리소설을 꺼냈다. 책 모서리가 둥글게 닳아 있었다. 나도 읽은 책이어서 범인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고, 어디까지 읽었는지만 물었다. 대화는 어렵지 않았다. 상대는 웃었고, 종이 울리자 책을 넣고 돌아앉았다. 나는 책 읽기라는 글자를 내려다봤다.

게임도 한다고 말하면 됐는데.

누가 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이상한 취미라고 할 사람인지 아직 알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상대가 쉽게 대답할 수 있을 만한 쪽을 먼저 골랐다. 그러고는 대화가 끝난 뒤에야, 내가 정말 하고 싶던 말이 빠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면 다음에는 조금 더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다음에 무엇을 말할지까지 미리 생각해 두면 상당히 그럴듯한 준비가 된다. 물론 그다음에도 ‘이것저것요’라고 대답할 수 있다는 문제가 남지만.

방과 후 교실에는 지퍼 잠그는 소리와 동아리 이름들이 뒤섞였다. 나는 가방을 메고 복도로 나왔다. 도서관까지 가장 조용히 가는 길은 알아 두었다. 본관 계단을 피해서 서쪽으로 돌아가면 떠드는 학생들과 몇 번 덜 마주쳤다. 학교에 온 지 사흘 만에 그런 길부터 외웠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당장 누구의 팔을 잡고 같이 가자고 할 수는 없었다.

서관으로 이어지는 복도의 게시판 앞에서 발이 멈췄다. 형형색색의 동아리 안내문 가운데 검은 사각형이 하나 보였다. 사진이 너무 어두워 처음에는 인쇄를 잘못한 줄 알았다. 가까이 가자 투구의 갈라진 이마와 검 끝이 드러났다. 알고 있는 기사였다. 사람 얼굴은 사흘을 봐도 아직 헷갈리면서, 작은 화면 속 갑옷의 흠집은 이렇게 바로 알아본다.

사진 위에는 ‘얘 때문에 세 시간 날림’이라고 적혀 있었다. 굵고 각진 글씨였다. 아래에는 둥근 글씨로 ‘왜 세 시간이나 했는지 궁금하면 서관 3층 연구부실로!’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디지털 미디어 연구부. 글과 영상, 사진을 만든다는 소개를 읽고도 나는 한동안 기사의 왼손만 보고 있었다. 저 손에는 방패가 없었다. 지붕에서 보았던 방패가 떠올랐다. 그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꺼내 본 적은 없었다.

저 사진을 고른 사람이 어떤 얘기를 하는지 들어 보고 싶었다. 잠깐 보고 돌아오면 됐다. 입부 상담이라는 말은 일부러 끝까지 읽지 않았다.

삼 층에 올라가니 계단 쪽의 차가운 공기가 등 뒤에 남았다. 복도 끝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바닥의 광택제를 드러냈고, 청소 도구함 옆에서는 물기 덜 마른 걸레 냄새가 났다. 열린 문에서 낮은 전자음이 새어 나왔다. 검이 돌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그 뒤로 여자애의 목소리가 겹쳤다.

“여기서 뒤로 피하면 죽는다니까?”

“네가 뒤로 피해서 죽은 거잖아. 게임이 네 손 잡고 뒤로 밀었어?”

“그래서 그걸 알려 주려고 만드는 거라고.”

문패에는 ‘디지털 미디어 연구부’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문틀에 가려진 채로 안쪽을 봤다. 서쪽 창을 따라 모니터와 장비가 놓여 있었고, 가운데 테이블에는 종이와 과자 봉지가 함께 펼쳐져 있었다. 입구 오른쪽 선반에는 빨간 과자 통이 보였다. 사진을 찍는 데 쓰는 배경지는 벽 옆에 말려 있었다. 나는 동아리실이라고 하면 책상과 회의용 의자부터 떠올렸는데, 여기는 누가 조금 전까지 먹고 떠들다가 잠깐 일어난 방 같았다.

붉은 머리를 반쯤 묶은 선배가 모니터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옆의 금발 선배는 한쪽 발로 의자를 조금씩 돌리며 과자 통 뚜껑을 닫았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한 뼘도 되지 않았지만, 서로 부딪힐 때마다 피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은 그런 작은 일을 일일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었다.

그때 화면 아래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백성을 버리고 혼자 살아남은 문지기.’

“버린 건 아닐 수도 있는데요.”

두 사람이 돌아봤다. 금발 선배의 발이 바닥에 닿고, 돌아가던 의자가 멈췄다. 그제야 나는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방 안까지 잘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진을 보고 돌아갈 사람이 굳이 남의 제목을 고칠 필요는 없었다.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보통은 인사부터 하는 편이기도 하고.

“……안녕하세요.”

가방끈을 쥔 손에서 땀이 났다.

2

붉은 머리 선배는 내 얼굴과 화면을 번갈아 봤다.

“이거 해? 문지기 잡았어?”

“네. 잡기는 했어요.”

선배는 옆 의자에 있던 가방을 들어 올려 제 발밑에 내려놓았다. 가방 윗부분에서 충전선이 빠져나왔는데, 발끝으로 자기 쪽으로 밀어 놓고는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보라는 뜻이었다. 내가 어느 반인지, 왜 왔는지는 아직 묻지도 않은 상태였다.

“야, 이름부터 물어봐야지.”

금발 선배가 테이블 끝의 종이들을 모았다. 손톱 끝이 종이에 걸리지 않도록 손가락을 살짝 세워 잡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 물건을 정리하면서도 나를 보고 웃었다.

“모모세 키라리. 이쪽은 아카바네 레드. 우리 둘 다 2학년. 너는?”

“1학년 시로미 네아입니다.”

“네아. 가방 여기 놓을래?”

앉아도 되는지 물을 차례가 이미 지나가 있었다. 가방까지 내려놓고 보니 곧 간다는 말은 더 어색해졌다. 나는 의자의 앞쪽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모니터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얇은 안경 아래로 입이 굳어 있었고, 귀 옆의 은회색 머리카락이 가방끈에 눌려 한쪽만 뻗쳐 있었다. 손으로 눌러 넣는 동안 레드 선배는 영상을 되감았다.

“왜 버린 게 아닌데?”

《종이 멎은 성》의 문지기는 텅 빈 마을 앞에 서 있다. 다가가면 말도 없이 공격하고, 쓰러뜨리면 깨진 쇠추를 떨어뜨린다. 문은 닫혀 있고, 주민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만 보면 정말로 혼자 살아남은 기사처럼 보인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세 번쯤 죽고 나면 그가 충성스럽든 비겁하든 일단 좀 비켜 줬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나는 무너진 성벽을 넘어 마을을 둘러본 뒤에도 그 문이 신경 쓰였다. 성문 뒤에는 지붕이 덮인 짧은 통로가 있었고, 마을로 나오는 쪽은 돌더미에 막혀 있었다. 마을이 비었다는 건 봤지만, 그 통로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문지기는 바깥에 있는데 빗장은 안쪽에 걸려 있다는 것도 이상했다.

“통로 지붕에 틈이 있어요. 거기로 빗장이 보여요. 밖에서는 걸 수 없는 거예요.”

“지붕에 올라갈 수 있어?”

그 질문을 듣자 화면이 작아 보이기 시작했다. 무너진 계단 끝을 가리키려면 몸을 조금 더 앞으로 내밀어야 했다. 나는 차양에 떨어지는 위치와 창틀을 밟는 순서를 설명했다. 레드 선배는 재생 막대를 움직여 내가 말하는 장소를 찾았다. 아니요, 거기 말고 조금 전이요. 그 말을 몇 번 주고받는 동안 의자도 모니터 가까이 옮겨졌다.

지붕의 틈은 캐릭터가 들어가기에는 좁았다. 카메라를 돌리면 빗장과 그 옆에 기대 놓인 방패까지 보였다. 방패에는 기사의 흉갑과 같은 문양이 있었다. 나는 그걸 먼저 설명했다.

“그럼 방패는 안에 두고 혼자 나온 거야?”

“그 사람 건지는 몰라요. 같은 문양이긴 한데요.”

문 뒤에서 누군가 빗장을 걸어 주었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기사가 혼자 문을 잠그고 도망쳤다고 정하기에는 모르는 것이 많았다. 나는 깨진 쇠추 얘기까지 꺼냈다. 종을 울리던 추가 저렇게 망가졌으니, 머리 위 종탑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쇠추에는 ‘마지막 종이 울릴 때까지, 문 앞에서……’라는 말이 남아 있었다. 그 뒤는 닳아서 읽을 수 없었다. 설명하려던 순서가 자꾸 바뀌었지만, 입은 잘 멈추지 않았다. 아까 책 제목을 묻는 말에는 그렇게 대답이 안 나오더니.

과자 봉지가 바스락거렸다. 나는 말을 멈췄다.

레드 선배가 삼각 과자를 집고 있었다. 아, 지루한가 보다. 생각이 거기까지 가자 갑자기 내가 한 말들이 전부 길게 느껴졌다. 이미 끝낸 얘기에 다른 근거를 붙이고, 그 근거를 이해시키려고 다시 앞의 일을 설명했으니 그럴 만했다. 나는 그 문장 뒤에 무슨 말이 이어졌을지 얘기하려다 삼켰다. 이쯤에서 죄송하다고 해야 할까. 무엇에 대해 사과하는지 설명하면 그것도 길어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도망갈 때까지 혼자 막아 줬다는 거야?”

레드 선배가 손가락의 가루를 휴지에 닦으며 물었다. 듣고 있었구나. 그런데 안심하기도 전에 다음 질문이 왔다.

“근데 왜 우리까지 죽이는데?”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부분은 생각해 봤다. 명령을 잊지 못했다거나, 플레이어를 적으로 착각한다거나. 문제는 어느 쪽에도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눈앞의 선배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을 기다렸다. 그냥 넘어가 주는 게 아니라, 정말 이상해서 묻는 얼굴이었다.

“그건 아직 모르겠어요.”

“난 그 기사 편 못 들어 주겠다. 어제 내 회복약을 몇 개나 뺏어 갔는데.”

레드 선배가 투덜거리자 키라리 선배가 웃으며 과자 통을 내밀었다. 나는 한 조각을 받아 놓고도 계속 기사를 봤다. 회복할 때 공격이 들어오는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 레드 선배가 또 기다려야 한다. 잠깐 고민한 끝에, 공격이 끝난 뒤에도 한 번 더 기다려야 한다고만 말했다.

“봐. 또 기다리래.”

레드 선배가 키라리 선배를 보며 억울한 얼굴을 했다. 나는 그 말이 내가 오래 떠들었다는 뜻인 줄 알고 어깨를 굳혔다가, 둘이 게임의 공격 속도를 두고 실랑이하는 것을 보고서야 힘을 뺐다. 마음까지 풀리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그럼 보여 줘. 네가 말한 지붕.”

레드 선배가 영상 창을 접고 게임을 켰다. 촬영할 때마다 돌려 쓴다는 성문 앞 저장 파일을 불러온 뒤 컨트롤러를 내 쪽으로 밀었다. 키라리 선배는 화면에 비친 창문을 보고 일어나 커튼을 당겼다. 금발 끝에 걸려 있던 햇빛이 사라지자 모니터의 검은 부분이 선명해졌다. 나는 그제야 앉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방 안에는 매운 과자 냄새가 났고, 오른쪽에서는 키라리 선배가 통 뚜껑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집에 가는 길에는 버스 창에 이마를 기대고 지붕에서 내려다본 빗장을 생각했다. 내가 보여 주었을 때 레드 선배가 화면 쪽으로 바짝 다가앉았던 것도 생각났다. 선배는 여전히 내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 반론을 다시 듣고 싶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혼자 할 때는 틀리지 않는 쪽이 훨씬 편했는데.

가방에는 입부 신청서 대신 메모가 들어 있었다. ‘내일 방과 후. 쇠추 설명 가져오기.’ 그 아래 둥근 글씨가 덧붙어 있었다. ‘간식 있음.’ 나는 버스가 흔들릴 때 메모가 접히지 않도록 책 사이에 넣었다.

연구부실에서 네아에게 처음 자리를 내어 주는 레드와 키라리

3

다음 날 연구부에 갔을 때는 빈 의자가 어디 있는지부터 보게 되었다. 어제와 같은 자리에 가방이 놓여 있었다. 레드 선배는 내가 오자 그것을 들어 내렸다. 그 짧은 동작을 보려고 문 앞에서 기다린 것 같아서, 나는 준비해 온 종이를 서둘러 꺼냈다. 같은 내용을 두 부 뽑아 왔다. 한 부는 내 앞에 놓고, 다른 한 부는 키라리 선배에게 건넸다.

다음 주 수요일에는 짧은 영상 상영회가 예정돼 있었다. 동아리에 관심 있는 학생들을 불러 좋아하는 것을 보여 주는 자리였다. 한 작품에 삼 분. 레드 선배는 문지기와 싸우는 장면을 준비했고, 키라리 선배는 화면을 처음 볼 사람에게 무엇부터 보여 줄지 고르고 있었다. 둘이 만들던 영상은 이미 삼 분에 가까웠다.

“너도 같이 만들래? 어제 한 문지기 얘기.”

레드 선배가 묻자 나는 종이를 가지런히 맞췄다. 같이 만든다는 말에 들뜨는 것이 먼저였는데, 그걸 들키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자료를 찾아 주는 일이라면 할 수 있었다. 틀린 내용을 고치는 것도. 하지만 내 얘기를 사람들 앞에 내놓는 일은 조금 달랐다. 세 사람이 앉아 있는 방에서도 내가 너무 오래 말하는지 계속 확인했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영상을 보는 동안에는 어디를 보고 있어야 할까.

“전부 하면 삼 분을 넘어요.”

“일단 제일 좋은 거 하나.”

집에 돌아가 책상 위에 쇠추의 설명을 펼쳐 놓았다. 녹차는 마시기 전에 식었다. 하나를 고르려고 다른 것들을 설명하다 보면 결국 처음보다 길어졌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라면 문 앞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기사는 성문 앞 돌계단 아래까지 쫓아오지는 않는다. 플레이어가 공격을 옆으로 피하고 계단 아래로 물러나 멈추면, 기사는 검을 낮춘다. 오 초쯤 뒤 나무를 긁는 듯한 소리가 난다. 헤드폰을 끼면 바로 귓가에서 나는 것처럼 들린다. 나는 처음 그 소리를 들은 밤, 문 건너편에 남은 사람이 있는 줄 알고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

왜 그때 움직이지 않았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게임이니 문을 두드려 보거나, 주변을 더 살피면 됐다. 그런데 내가 움직이면 저 안의 소리가 멎을 것만 같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화면을 놓고 그렇게 기다리는 기분을, 아이템 설명 세 줄로 전달할 수 있을까.

녹음을 몇 번 지웠다. ‘여기서 기다리면’이라는 말 뒤의 숨이 너무 크게 들렸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나자 재생을 멈췄다가 아무도 내 방에 들어오지 않아서 혼자 민망해졌다. 금요일에 가져간 영상은 오십팔 초였다. 잘랐다는 사실이 티 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내가 볼 때는 빠진 말들이 전부 생각났다.

레드 선배는 끝까지 본 뒤 화면 아래의 편집 막대를 잡았다.

“여기랑 여기 살리면 되겠다.”

멈춰 있던 구간이 줄어들었다. 나무 긁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쇠추의 설명으로 넘어갔다. 나는 모니터에 손을 뻗었다가, 선배 손 위로 겹칠 것 같아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거기는 남겨야 해요.”

“아무것도 안 하잖아.”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오히려 대답하기 어려웠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걸 보여 주려고 다른 장면들을 지웠다.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들리는 것이 있어서. 그런데 화면을 멈춰 놓고 그렇게 설명하자, 억지로 의미를 붙이는 사람처럼 들렸다.

“소리가 나요. 안에서 누가 열려고 하는 것처럼요.”

다시 재생하자 레드 선배가 스피커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문 삐걱대는 거? 근데 확실하진 않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선배는 잠깐 생각하더니 전투부터 보여 주고 설명할 때 뒤에 소리를 넣자고 했다. 선배의 전투 영상에는 검이 부딪힐 때마다 큰 자막이 떴다. 공격 두 번, 한 박자 쉬고, 세 번째. 빠르고 알기 쉬웠다. 나도 이걸 먼저 봤다면 몇 번은 덜 죽었을 것이다.

그건 알았다. 그런데 그 뒤에 내 소리를 깔아 놓으면 누가 들을까. 나한테는 밤새 고른 장면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싸움 뒤에 흐르는 배경음이 되는 것이다. 선배가 내 수고를 알 리 없다는 생각과, 그래도 조금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같이 들었다. 어느 쪽을 먼저 말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소리가 잘 안 들릴 거라는 말만 반복했다.

키라리 선배가 옆에서 종이를 들었다.

“여기 글자도 조금 줄이면 어때? 문을 보려는데 쇠추 설명 읽다가 놓쳤어.”

“둘을 같이 봐야 연결돼요.”

“나는 아직 게임을 안 해 봐서, 이름이 여러 개 나오면 헷갈려.”

“그러니까 설명이 필요한 거예요.”

키라리 선배의 손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입술도 한 번 열렸다 닫혔다. 나는 편집 막대에서 잘린 구간만 봤다. 글자를 줄이면 함께 봐야 할 장면까지 빠질 것 같았다.

“처음에는 전투만 보여 주실 생각이었잖아요.”

레드 선배가 마우스를 놓았다.

“그래서 바꾸고 있잖아.”

“거의 다 없어졌는데요.”

“나도 잘랐어. 여기 앞에.”

나는 선배가 가리킨 앞부분을 보지 않았다. 내 몫의 출력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엄지 아래에서 종이 모서리가 접혔다.

“그냥 멋있게 싸우고, 예쁜 장면 넣으면 되는 거였네요.”

입 밖으로 나오자 머릿속에 있을 때보다 훨씬 못되게 들렸다. 키라리 선배가 의자에서 등을 뗐다. 잠깐 방이 조용해졌다. 컴퓨터 안에서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손바닥 아래의 테이블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렇게 만들 생각 없어.”

키라리 선배가 내 종이를 테이블에 놓았다. 연필로 그은 동그라미와 물음표들이 보였다. ‘누가?’ ‘이건 언제?’ 내가 여러 번 지웠다 쓴 설명 사이에, 선배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다 읽었어. 네가 준 거. 그런데 모르겠다고 하면 내가 대충 본 게 되는 거야?”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하면 적어도 시간을 조금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나는 조금 전까지 선배가 게임을 안 해 봐서 이 장면을 가볍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종이 위의 물음표를 보고도, 미안하다고 먼저 말하면 내 오십팔 초를 전부 양보해야 할 것만 같았다.

“제가 직접 만드는 게 빠르겠어요.”

레드 선배는 나를 보다가 “그럼 그렇게 해”라고 말했다. 짧아서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는 대답이었다. 나는 가방을 들다 과자 통을 건드렸다. 통이 쓰러지기 전에 키라리 선배가 잡았고, 뚜껑이 테이블에 부딪혀 덜컥 소리를 냈다. 미안하다는 말은 그때도 나오지 않았다.

복도에 나오자 아까 방에서 들리지 않던 학생들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문을 닫았는데도 귀에 남은 키라리 선배의 낮은 목소리는 이상하게 또렷했다. 나는 계단을 빨리 내려갔다. 뒤에서 부르면 멈출 생각이었다. 아무도 부르지 않아서, 계속 내려가야 했다.

4

혼자 만드니 결정은 빨랐다. 토요일 밤에 영상을 완성했고 일요일에는 자막을 고쳤다. 삼 분 안에 들어갔다. 문 앞의 소리는 남겼고, 내 해석에 반대되는 근거도 마지막에 넣었다. 이제 누가 설명이 부족하다고 해도 보여 줄 수 있었다.

재생이 끝나자 방이 조용해졌다.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가 문밖에서 들렸고, 책상에 놓아둔 캉쵸 상자는 거의 그대로였다.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영상을 다시 틀었다.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 보려고 했다. 그런데 곧 무슨 말이 나올지, 어느 자막이 뜰지 다 아는 상태로는 무엇이 어색한지 알 수 없었다. 아는 내용인데도 자꾸 첫 화면으로 돌아갔다.

키라리 선배가 적어 둔 질문을 기억나는 대로 내 출력물에 옮겼다. 그 옆에 답을 적어 보았다. 빗장을 누가 걸었을지, 기사가 언제 밖으로 나왔을지. 생각한 순서는 있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이미 닫힌 문뿐이었다. 확실한 것만 남기려니 지우는 문장이 자꾸 생겼다. 직접 만드는 게 빠르다고 말하고 나왔으면서, 정작 시간을 쓰고 있는 것은 선배가 물어본 부분이었다. 이것까지 완성하면 오해가 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한 말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건 문장을 고쳐 적는다고 없어지지 않았다.

월요일 점심시간에는 가까운 책상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 보니 학생 둘이 휴대전화를 가운데 놓고 동물 영상을 보고 있었다. 커다란 개가 제 몸보다 작은 방석에 앉으려다가 옆으로 흘러내렸다. 나도 더 보고 싶어서 몸을 기울였는데, 먼저 웃은 학생이 “잠깐, 여기 다시”라며 친구 팔을 잡았다. 손가락 하나가 화면을 되감았고 둘은 같은 부분에서 또 웃었다.

나는 녹차 병의 뚜껑을 닫으려던 손을 멈췄다. 저 영상은 몇 번이고 다시 봐도 좋겠구나. 틀린 곳을 찾으려고 돌리는 게 아니니까.

방과 후 서관으로 가면서는 답을 적은 종이를 전해 주기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가방 안에 내 영상을 담은 저장 장치까지 넣고 나왔지만, 그건 혹시 필요할까 봐 챙긴 것이었다. 무엇에 필요할지는 정하지 않았다. 종이를 건네고 내려오면 됐다. 그러기에는 삼 층으로 올라가는 발이 너무 느렸다.

연구부실 앞에서 안경을 벗어 닦았다. 렌즈는 별로 더럽지 않았다. 다시 쓰고도 바로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안에서는 둔탁하게 넘어지는 소리 뒤로, 게임에서 질 때마다 울리는 익숙한 효과음이 들렸다.

“와. 진짜 너무하네.”

키라리 선배 혼자 앉아 있었다. 창가의 커튼은 반쯤 닫혀 있었고, 비어 있는 레드 선배의 자리에는 헤드폰 줄 대신 종이가 널려 있었다. 선배는 컨트롤러를 무릎에 내려놓고 손가락을 폈다. 늘 쉽게 움직이는 것 같던 손이 오늘은 조금 굳어 보였다. 테이블에는 딸기 그림이 있는 음료 팩과, 내가 지난주에 건넨 자료가 있었다.

문틀을 두드리자 선배가 돌아봤다.

“왔네.”

그게 전부였다. 웃으며 가방 자리를 비워 주지도 않았고, 왜 왔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나는 종이를 내밀었다. 선배는 받아 놓고 “잠깐만. 저기까지는 가 보고”라며 컨트롤러를 들었다. 돌아가도 좋다는 뜻일까, 조금 기다리라는 뜻일까. 모르겠어서 그대로 서 있었다.

캐릭터가 기사에게 맞아 휘청했다. 체력이 조금 남았다. 선배의 엄지손가락이 회복 버튼으로 움직였다.

“회복하시면 안 돼요.”

말을 하고 나서 내가 또 설명부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선배의 손이 멈췄고, 그사이 공격이 한 번 더 들어왔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말하지 않았으면 어쩌면 살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의자 등받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죄송해요. 지금은 아니고, 다음 공격까지 피한 다음에요.”

“그 공격이 언제 시작되는지 모르겠어.”

선배는 컨트롤러를 내 쪽으로 넘기지 않았다. 다시 시작해서 같은 길로 갔다. 내가 하면 금방 저기까지 갈 수 있었다. 그 말을 삼키는 데에는 금요일의 종이가 도움이 되었다. 대신 나는 화면을 가까이 봤다. 이미 익숙해서 더는 눈여겨보지 않게 된 동작을,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까.

“기사가 오른발을 먼저 옮겨요. 검을 들기 전에요.”

이번에는 피했다. 키라리 선배가 짧게 “오!” 하고 소리를 냈다. 그다음 공격에는 죽었다. 나는 거의 앉듯 허리를 굽힌 채 화면을 보고 있었다. 선배가 다시 시작할 때에야 나도 의자를 조금 빼서 앉았다. 그걸 허락받아야 하는지 고민할 틈은 지나가 있었다.

다섯 번째에는 성문이 보이면서도 검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멈출 수 있었다. 내가 멈추라고 하자 선배가 손가락을 뗐다. 주인공이 숨을 고르고, 기사가 검을 낮췄다. 게임 속 바람이 헐거운 천을 흔들었다. 나무를 긁는 소리가 났다.

“……저 안에 뭐가 있네.”

“없을 수도 있어요. 바람일 수도 있고요.”

선배가 나를 봤다.

“그럼 왜 안 움직여?”

내 손은 의자 끝을 잡고 있었다. 컨트롤러는 선배가 들고 있는데, 내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안에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조금만 더 들으면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어본 말에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선배는 그 모습을 보고도 재촉하지 않았다.

방 안의 빛이 금요일과 비슷했다. 테이블 끝은 환하고 모니터 아래는 어두웠다. 그날 나는 그 밝은 부분에 종이를 밀어 놓고, 어두운 화면 안에서 내 장면이 지워지는 것만 봤다. 오늘은 옆에 앉은 사람이 어느 버튼도 누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의식했다. 재미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지루하지 않으냐고도. 하지만 말을 하면 함께 듣고 있는 소리가 끊길 것 같아서, 이번에는 조용히 있었다.

한참 뒤 키라리 선배가 캐릭터를 성문 쪽으로 한 걸음 옮기자 기사가 다시 검을 들었다. 캐릭터는 세 번의 공격을 피하고 네 번째에 쓰러졌다.

“여기 진짜 짜증 나. 근데 그 문은 계속 보고 있으면 좀 싫어져. 안에서 뭐가 나오면 좋겠는데, 나오면 또 무서울 것 같고.”

나는 화면이 어두워지는 것을 봤다. 그 기분을 말하고 싶었던 건데. 그렇게 말하면 되는 거였나. 내 종이에는 문구와 빗장과 추정한 순서가 있었지만, 처음 그 앞에 멈춰 있던 밤의 기분은 없었다.

“금요일에요. 선배가 그냥 예쁜 것만 고른다고 생각했어요. 안 해 보셨다고 해서.”

“응. 그렇게 들렸어.”

이번에는 종이 뒤에 숨을 수 없었다. 나는 테이블 모서리의 벗겨진 칠을 보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선배는 바로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음료 팩을 들어 마셨는데 빈 것인지 빨대에서 바람 새는 소리만 났다. 나는 그 짧은 소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나 지금도 이 게임 잘 몰라. 그래도 네가 좋아하는 데가 어딘지는 알고 싶었거든. 다음에도 모르면 물어볼게. 대충 본 건 아니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목 안쪽이 잠깐 막힌 것 같아서 대답은 늦게 나왔다.

“저도 설명을 잘 못했어요.”

“발 움직이는 거, 그건 좋았어.”

선배가 자료 옆에 놓인 연필을 굴렸다. 나는 연필이 바닥으로 떨어질까 봐 손을 내밀었다가, 선배가 손목을 대어 막는 것을 보고 손을 거두었다. 사과를 했다고 금방 예전처럼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은 옆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성문 앞에서 소리를 기다리는 네아와 키라리

5

복도에서 빠른 발소리가 났다. 레드 선배가 헤드폰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가 나를 보고 멈췄다. 나는 일어나야 할지 몰라 무릎만 조금 움직였다. “어.” “안녕하세요.” “……왔네.” 내가 레드 선배와 세 마디를 주고받는 동안 키라리 선배는 빈 음료 팩을 납작하게 접었다. 접히는 모서리마다 바삭한 소리가 났다. 아무도 다음 말을 대신 꺼내 주지 않았다.

레드 선배가 헤드폰을 내려놓았다.

“네 부분 안 지웠어.”

“알아요. 원본은 있으니까요.”

“그 얘기가 아니라.”

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원본 파일이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건 사실 처음부터 알았던 것 같다. 다만 어느 뜻으로 받아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선배가 다시 같이 만들자고 말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막상 그런 말을 꺼낼 틈은 내가 막고 있었다.

“금요일에 네 말 듣지도 않고 잘랐어. 미안.”

레드 선배는 서서 말했다. 손을 얹은 의자를 앞뒤로 조금 움직이고 있었다. 사과할 때도 상대를 똑바로 볼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선은 내가 아니라 모니터 아래에 가 있었다. 나는 그제야 이 선배도 지금 무슨 표정을 해야 할지 모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저도 선배가 자르신 건 안 봤어요. 제 것만 없어진다고 생각했어요. 죄송해요.”

“내 거 이십 초 덜어 냈다. 세 번 죽는 장면.”

“그건 아까웠어.” 키라리 선배가 말했다. “세 번째 넘어질 때 네가 하는 말이 제일 좋았는데.”

레드 선배가 짧게 웃었다. 나는 가방 지퍼를 열었다. 저장 장치가 손에 닿았는데도 꺼내기를 잠깐 망설였다. 보여 달라는 말은 아직 없었다. 그냥 가져온 게 있다고 해도 됐지만, 그 말을 하면 내가 다시 같이 만들고 싶어서 왔다는 걸 두 사람 모두 알게 될 것이다.

이미 삼 층까지 올라와서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있었다. 이제 와서 그것만 숨겨서 무엇을 하려는지.

“제가 만든 거 있어요. 봐 주실래요?”

레드 선배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키라리 선배도 모니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재생하는 동안 아무도 마우스에 손을 대지 않았다. 내 목소리가 나올 때는 부끄러워서 모니터 받침의 얼룩만 보았다. 자막이 바뀌는 순간 키라리 선배가 고개를 조금 움직이는 것이 곁눈에 들어왔다. 나는 속으로 그 부분을 기억해 뒀다. 이번에는 어디에서 헷갈렸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영상이 끝나자 레드 선배가 마지막 질문부터 시작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기사가 누구를 기다리는지 모른다는 얘기였다.

“그게 제일 궁금한데.”

앞의 근거들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다. 나는 그 말 대신, 자막이 바뀔 때 어디가 헷갈렸는지 키라리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는 종이에 쇠추와 기사 사이의 화살표를 그리며 물었다. “이 쇠추가 왜 기사 얘기가 되는 거야?”

“기사를 쓰러뜨리면 나오는 물건이에요.”

“아. 그 말을 먼저 해 줘.”

나는 녹음할 문장 맨 앞에 그 한 줄을 적었다. 순서를 따라 설명하면 쉽게 이해할 줄 알았다. 내가 그 순서로 알게 되었으니까. 선배들은 아직 어느 부분이 궁금한지 고르는 중일 수도 있었다.

“궁금한 데부터 보여 드리면, 앞부분도 보고 싶으실까요?”

“나는 그럴 것 같아.”

키라리 선배가 대답하자 레드 선배가 턱을 괴었다.

“근데 충성스러운 기사인지는 아직 모르겠어.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저놈 무서워서 빗장 건 거면?”

그건 생각하기 싫은 쪽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누군가를 지킨 기사라고 여기면, 비어 있는 마을을 돌아다녔던 시간이 조금 덜 허무해졌다. 그가 무언가 지켰으니 아무도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쇠추에 남은 말은 ‘마지막 종이 울릴 때까지, 문 앞에서……’까지였다. 나는 그 뒤를 기다리라거나 지키라는 뜻으로 읽고 있었다. 문 안쪽 방패에도 누구를 지켰다는 표시는 없었다. 기사의 것인지, 누가 거기 놓았는지부터 몰랐다. 읽히지 않는 부분마다 내가 바라는 쪽의 말을 붙여 놓은 셈이었다.

“그 해석도 가능해요.”

“그럼 둘 다 넣자.”

“삼 분인데요.”

레드 선배는 자기 전투 영상을 열었다. 기사의 공격을 피하고 마지막 일격을 넣는 장면이었다. 처음 볼 때도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키라리 선배가 여러 번 죽는 것을 옆에서 보고 나니 같은 영상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마지막까지 거의 맞지 않고 싸우려면 몇 번을 했을까. 선배는 그 부분을 통째로 선택해 잘라 냈다. 검이 처음 내려오는 장면만 남았다.

“안 아까우세요?”

“아까워.”

레드 선배가 잘라 낸 전투 장면을 별도 파일로 저장했다. 화면에 빈칸이 생겼다. 거기에 내가 남기려던 기다림과 소리가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고맙다는 말도 선배 영상을 도로 넣어 달라는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들려줄 때 그 소리가 들리는지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나도 종탑부터 차례로 읽어 주던 설명을 지웠다. 기사에게서 쇠추가 나왔다는 한 문장과, 읽을 수 있는 문구만 남겼다. 지운 문장은 종이 맨 아래에 작게 옮겨 적었다. 영상에서 빼기로 했다고 전부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키라리 선배가 제목을 바꿨다. ‘저 기사는 누구를 기다릴까?’ 영상 순서도 바뀌었다. 성문이 먼저 나오고, 주인공이 기사의 공격을 한 번 피한 뒤 거리를 벌렸다. 멈춰 선 화면에서 소리가 났다. 키라리 선배는 휴대전화로도 재생해 보더니 잘 안 들린다고 했다. 나는 자막을 먼저 읽으면 기다리는 기분이 사라질까 봐 걱정했다. 이번에는 걱정하는 이유까지 말해 봤다.

“그럼 한 번은 그냥 보여 주고, 다음에 짧게 다시 들려주는 건 어때?”

키라리 선배가 같은 부분을 복사해 바로 뒤에 붙였다. 두 번째 화면 아래에만 소리를 설명하는 짧은 자막을 넣었다. 처음 볼 때 놓친 사람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두 번 재생되는 성문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틀어 보니 삼 분보다 몇 초 짧았다.

테이블 위의 햇빛이 조금씩 옆으로 옮겨 갔다. 레드 선배가 헤드폰 하나를 내 쪽으로 건넸고, 나는 다 듣고 나서 키라리 선배에게 넘겼다. 레드 선배는 쇠 긁는 소리 같다고 했고, 키라리 선배는 의자를 천천히 미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나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듣고 나니 쇠 같기도 했다. 금요일보다 확신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영상을 닫고 집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레드 선배가 펼쳐 놓은 봉지에서 삼각 과자를 한 조각 집어 먹었다가 입안이 매워졌다. 레드 선배가 물병을 건넸다. 키라리 선배는 내 표정을 보고 웃다가 그 봉지를 레드 선배 쪽으로 밀어 놓았다. 나는 물을 마시며 두 사람이 평소에는 이 정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것인지 생각했다. 그건 조금 걱정되는 문제였다. 여기에 자주 오게 되면 간식을 따로 준비해야 할지도 몰랐다.

“저도 내일 가져올게요. 캉쵸요.”

“좋아. 그럼 내일은 안 맵다.”

키라리 선배의 말에 레드 선배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웃다가 내일이라는 말을 내가 먼저 꺼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누구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덕분에 취소할 이유를 찾지 않아도 됐다.

6

화요일에는 약속한 캉쵸를 가져갔고, 세 사람 몫으로 나눈 뒤 목소리를 다시 녹음했다.

수요일에는 앞쪽에 의자 여섯 개를 두 줄로 놓았다. 자리가 하나씩 차는 동안 레드 선배는 뒤쪽 노트북 앞에, 나는 그 옆 벽에 붙어 있었다. 의자 다리에 낀 먼지와 테이블 아래의 전선이 눈에 들어왔다. 영상 속 내 목소리보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어제 세 번이나 다시 녹음했는데도, 오늘 아침에는 첫 문장을 조금 다르게 읽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라리 선배가 삐뚤어진 의자를 줄에 맞춰 놓고 허리를 폈다. 손바닥으로 치마의 구김을 쓸어내리다가 벽에 붙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앞쪽 빈틈을 가리켰다.

“안 보이면 의자 가져다 앉아.”

나는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사실 아주 잘 보였다. 앞에 앉은 사람이 화면에서 언제 눈을 떼는지도 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 것을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더 가까이 가기는 싫었다.

조명이 꺼지고 스크린에 성문이 나타났다. 레드 선배의 목소리와 함께 검이 내려왔다. 앞줄 학생 하나가 어깨를 움찔했다가 친구를 보고 웃었다. 영상 속 주인공은 간신히 살아남아 뒤로 물러났다. 기사가 검을 내렸다.

그 오 초가 시작됐다.

집에서 편집할 때는 너무 짧았다. 여기서는 프로젝터 팬이 한 바퀴씩 도는 소리가 다 들리는 것 같았다. 복도에서 누군가 다른 동아리 이름을 불렀고, 앞줄 학생이 발목을 바꿔 꼬았다. 나는 내 손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정말로 영상이 고장 났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아무것도 안 하잖아.’ 레드 선배가 그때 말한 건 이 기분이었을까. 이제 소리를 크게 키우고 싶었지만, 노트북까지 가는 몇 걸음이 화면보다 더 눈에 띌 것이다.

그때 왼쪽 앞자리 학생이 고개를 기울였다. 나무 긁는 소리가 났다. 아주 작았다. 두 번째 재생에서 자막이 뜨자 그 학생이 화면 쪽으로 몸을 숙였다. 나는 손등을 놓았다. 그 애가 방금 정말 소리를 들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한 사람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불이 켜지자 눈이 부셨다. 박수가 드문드문 났다. 한 학생은 다음 영상 순서를 물었고, 다른 학생은 어려워서 자기는 못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스크린의 성문을 봤다. 모두가 그 문 앞에 남아 주지는 않는구나. 서운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일어나려고 가방을 챙기는 사람에게 다시 오 초만 달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뒷줄 통로 쪽에 앉은 학생이 손을 들었다.

“근데 안에 사람 있어요?”

레드 선배가 나를 봤다. 나는 벽에서 몸을 뗐다. 조금 전까지 내 목소리는 스피커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대답해야 했다.

“저는 아직 안까지 못 들어가 봤어요. 마을에는 다른 길로 갈 수 있는데, 성문 뒤 통로는 돌더미에 막혀 있어요. 지붕 틈으로도 문 바로 뒤만 보여요.”

“그럼 그 소리는 뭐예요?”

나는 입술을 적셨다. 내가 정리한 설명을 전부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질문 하나가 나오면 그 뒤에 붙일 근거들이 먼저 떠올랐다. 그런데 학생은 아직 성문을 보고 있었다. 지금 궁금한 것은 하나였다.

“저도 그게 궁금해서 계속 가 보고 있어요.”

학생은 아까 나온 기사 얘기를 했다. 안에서 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밖에서 두드리는 것은 아니냐고. 문이 열리지 않으니까 검으로 긁는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레드 선배가 소리 나기 전 장면으로 되감았다. 기사가 검을 낮추는 데까지는 보였다. 다음 순간 화면이 문 쪽으로 확대되면서 팔은 화면 밖으로 나갔다. 내가 그렇게 편집했다. 레드 선배가 편집 전 영상도 열었지만, 소리가 날 때 검을 든 손끝은 주인공의 어깨 뒤에 가려져 있었다. 직접 게임을 할 때도 그 소리가 나면 문만 봤다. 기사의 팔이 그때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본 기억이 없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화면에서 보지 않은 것이 또 나왔다.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저 질문까지 예상했더라면 답을 준비할 수 있었을 텐데.

옆에서 레드 선배가 작게 말했다.

“다시 가야겠네.”

나는 학생에게 그 움직임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레드 선배가 다시 가자고 한 뒤에도, 나는 주인공의 어깨에 가린 손 쪽을 보고 있었다.

상영회가 끝나고 의자를 옮겼다. 금요일에 내가 나간 문으로 학생들이 하나씩 빠져나갔다. 키라리 선배가 두 개를 한꺼번에 들려다가 하나를 내려놓았고, 그 의자는 내가 대신 들었다. 모니터 옆에 의자를 밀어 넣자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게임 속 소리와 닮았는지 잠깐 들어 보았다. 조금 달랐다. 옆에서 키라리 선배도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있었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는 묻지 않았지만, 나는 먼저 웃었다.

레드 선배가 테이블에 남은 신청서를 모았다. 선배가 내 앞의 종이까지 집으려 하기에 나는 손을 올렸다.

“이건 제가 쓸게요.”

“들어오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드 선배는 종이를 놓더니 “우리 또 싸울 수도 있는데”라고 했다. 키라리 선배가 왜 지금 그런 말을 하느냐며 팔을 툭 쳤다. 나는 펜 뚜껑을 열었다. 그 말은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앞으로는 서로 잘 이해할 거라는 대답이었다면, 금요일 같은 일이 생길 때 내가 또 실패한 것처럼 느꼈을지도 몰랐다.

“저도 선배 해석에 아직 동의 안 해요.”

레드 선배가 웃었다.

“그건 들어와서 계속해.”

이름과 학년을 쓰고 취미 칸에 도착했다. 책 읽기라고 쓰면 되었다. 실제로 책도 읽었고, 전에 그렇게 썼을 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나는 펜을 잠깐 들고 있다가 ‘게임’이라고 적었다. 괄호를 열고 ‘아이템 설명 읽기’라고 덧붙이니 글씨가 칸 끝에 닿았다. 조금 작게 쓸 걸. 하지만 다시 쓰려고 지우지는 않았다.

키라리 선배가 종이를 보다가 물었다.

“네아, 시로쨩이라고 불러도 돼?”

나는 펜을 멈췄다. 시로쨩. 다른 사람을 부르는 소리 같았다. 네아라고 부르면 된다고 대답하려다가, 선배가 내 반응을 기다리는 것을 봤다. 이렇게 부르고 싶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나는 이름 칸을 내려다본 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귀가 뜨거웠다. 여기서 얼굴까지 들면 들킨다는 생각을 했는데,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못 봤을 리는 없었다.

레드 선배가 내가 쓴 신청서를 맨 위에 놓고 종이 모서리를 맞췄다. 키라리 선배는 내일도 이 시간에 오면 된다며 가방을 집어 들었다. 가방을 메면 집에 갈 시간이었다. 레드 선배는 게임을 켜고 기사 팔만 확인하자고 했다. 키라리 선배가 의자를 하나 더 끌어왔다. 등받이가 레드 선배의 의자에 부딪혔고, 선배는 화면을 보면서 자기 의자를 옆으로 밀었다.

나는 가방에서 오늘도 챙겨 온 캉쵸 상자를 꺼냈다. 접힌 윗부분을 열고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 처음 이 방에 왔을 때 과자 한 조각을 받아 놓고 먹는 것도 잊었던 일이 생각났다. 오늘은 상자 안을 들여다보며 깨지지 않은 것을 골랐다. 레드 선배가 어느새 게임을 시작했고, 키라리 선배의 소매가 내 팔에 살짝 닿았다. 의자를 더 옮겨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대로 두었다.

화면 속 주인공이 돌계단을 올라갔다. 문지기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레드 선배가 늘 가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려는 순간, 나는 화면 왼쪽의 검은 틈을 가리켰다.

“선배, 저 아래는 아직 안 가 봤어요.”

키라리 선배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떨어지면 죽어?” 나는 아마 그럴 거라고 대답했다. 레드 선배는 잠깐 가장자리를 살피더니, 그럼 해 봐야겠다고 말했다.

기사의 팔만 확인하고 나면 집에 가려고 했다. 거기서 왼쪽으로 내려갈 이유는 아직 없었다. 나는 발견한 단서도, 그곳에 무엇이 있을 거라는 설명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냥 가 보고 싶어서 가리켰다.

레드 선배가 방향을 틀었다. 나는 상자가 넘어지지 않도록 테이블 안쪽으로 밀어 놓고, 의자를 모니터 쪽으로 조금 당겼다.

과자 상자를 사이에 놓고 게임 화면을 보는 세 사람

— 끝 —

교복 차림으로 뒤돌아보며 살짝 웃는 네아 · 전신 엔딩 삽화

댓글

0

로그인 없이 남길 수 있어요. 작성한 브라우저에서 수정·삭제할 수 있어요.

전체 댓글 0

한국어 · English · 日本語

아직 댓글이 없어요. 첫 이야기를 남겨 주세요.

이 내용 공유하기

Game Sunakku에서 더 알아보기

지금 구독하여 계속 읽고 전체 아카이브에 액세스하세요.

계속 읽기